완벽주의의 함정, 침묵을 선택하다
한국말로 할 때는 주어도 목적어도 빼고 대충 말해도 서로 통합니다. 그런데 왜 영어로 말할 때는 꼭 문법에 맞춰 완벽한 문장으로 말하려 했을까요? 아마 영어에 대한 자격지심에 ‘완벽하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say, tell, talk, speak 중 뭘 써야 하지?”, “Teach의 과거형은 뭐였더라? Teached?” 같은 고민을 하면서 말이죠.
입장을 바꿔보면, 외국인이 한국말로 좀 틀리게 얘기한다고 우리가 못 알아듣지는 않잖아요. 오히려 귀엽게 봐주고, 열심히 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기도 하고요. 네, 좀 틀리게 말해도 괜찮습니다. 전 그 사실을 해외 생활 4년이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완벽하게 말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점점 말수가 줄어든 저는 업무 외 대화에는 소극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더 일에만 매달리게 되었죠. 일을 할 때는 굳이 말을 많이 하지 않아도 되니까요. 덕분에 성과는 올라갔지만, 그 성과를 제대로 어필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을 말하려는가’가 더 중요했다
제가 말하고 싶었던 영어는 완벽한 문법이 적용된 한 문장이었습니다. 물론, 그 완벽한 문장을 통해 ‘케이트는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는 사람’이라는 걸 어필하고 싶었던 거겠죠. 하지만 듣는 사람은 사실 제가 어떻게 말하는가보다,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에 더 집중했습니다. 그리고 그 내용이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고 비즈니스에 도움이 될지에 대해 알고 싶어했죠.
나중에 정말 친해진 동료나 친구들은 제가 한 말에 대해 “그럴 때는 이렇게 표현해” 또는 “이 단어가 더 맞아”라고 조언해주었습니다. 처음에는 좀 창피했지만, 그들은 제 영어 성장을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 외에는 정말 다들 자기가 듣고 싶은 내용만 듣더군요.
물론 대충 말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너무 문법에 신경 쓰느라 하고 싶은 말만 하려다 타이밍을 놓치는 것보다는, 상대방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파악하고 문법이 좀 틀리더라도 시기적절하게 전달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은 정보 전달에 있으니까요.
회사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맥락’
요즘 AI가 발전하면서, 키워드 매칭에 의존한 검색 결과가 아닌 검색자의 의도에 맞는 결과를 보여주려 많은 기업들이 투자하고 있습니다. ‘애플에 대해 알려줘’라고 질문했을 때, 그것이 ‘사과’를 묻는 것인지 ‘Apple’이라는 브랜드를 묻는 것인지 그 의도를 파악해야 답을 할 수 있죠. 이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선 대화나 글의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사에서의 커뮤니케이션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나라, 인종,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함께 일하는 글로벌 회사에서는 각자의 문화에 따라 대화 방식이 다릅니다. 다들 똑같은 영어를 쓰는데도, 누구는 핵심만 말하고, 누구는 빙빙 돌려 말하고, 누구는 아예 말을 안 하거나, 아주 직설적인 사람도 있죠.
“We are working on it”의 의미
한번은 미국 본사의 VP(부사장)가 홍콩에 와서 전체 팀 회의를 진행했습니다. 그 VP의 담당 팀 중 하나가 웹사이트를 구축하는 ‘Product’ 팀이었죠. 마케팅팀들이 모인 회의였기에 “이것도 해달라, 저것도 해달라”, “언제까지 해줄 거냐” 등 많은 요구사항과 질문들이 쏟아졌습니다.
그 질문들에 대한 VP의 답변은 단 한 문장이었습니다. “We are working on it.” 솔직히 좀 황당했죠. 수많은 질문과 불만에 대해, 그리고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 물었는데 “우리는 일하고 있다”라니요. 한국 회사였다면 아마 욕부터 나왔을 겁니다. ‘내가 한 질문을 이해한 건가? 이해했다면 어떻게 저런 답을 하지?’ 싶어 다시 공격적으로 질문했습니다. “그래서 언제까지 해줄 건데?”
그러자 VP는 다시, **”Again, we are working on it”**이라고 답했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질문을 멈췄습니다. 그 답변은 ‘지금 당장 답을 줄 수 없거나, 해도 정확하지 않거나, 장담할 수 없거나’ 혹은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위치나 직급이 아니거나’라는 의미로 해석해야 했죠. 이럴 때 무리하게 계속 질문을 해대면 오히려 저만 ‘그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바보’가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답변은 “우리 팀원들이 열심히 일하고 있으니, 상세한 내용은 때가 되면 담당자들이 답을 줄 것이다”라는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좀 더 높은 위치에 있었다면 그의 답변이 달라졌겠죠.
조심스러운 미국식 화법
또 다른 사례는 제 미국 매니저 ‘Tim’의 이야기입니다. 이분은 대화법이 참 직설적이지 않았습니다. 무슨 이야기를 시작하면, 서두와 곁가지 이야기가 20분 이상 걸리곤 했습니다. 30분 미팅에서 20분을 주변 이야기만 하다가 10분 안에 뭔가 의사결정이 필요한 이야기를 꺼냈죠. 결국 제가 말을 끊어줘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습니다. 처음에는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참고 기다렸는데, 나중에는 이건 아니다 싶어 제가 기분 나쁘지 않게 끊을 타이밍을 찾아 대화를 진행했습니다.
한번은 APAC 브랜드 담당자들과 화상 회의를 했습니다. 브랜드팀은 업무상 좀 공격적이거나 ‘빨강’과 같은 극 E(외향적) 성향의 캐릭터가 많습니다. 이분들 중 특정 나라분이 좀 공격적인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은 한마디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제 기준에서는 “하겠다, 안 하겠다”, “왜 올랐다, 떨어졌다”, “문제가 뭐다, 어떻게 해결하겠다” 식으로 명확하게 말하면 됐죠.
그런데 Tim은 그 답변을 5분 넘게 주저리주저리, 핵심은 이야기하지 않고 주변 이야기만 빙빙 돌려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화법이 앞서 말한 VP의 화법과 결과적으로는 같다는 거죠. 결국 ‘언제까지 어떻게 하겠다’는 확답은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이런 두루뭉술하고 명확하지 않은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저렇게 영어 잘하는 사람들이 왜 답변을 저렇게 하지?’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나중에 Tim이 그러더군요. 공식적인 회의에서의 답변은 조심해야 한다고. 언제까지 한다고 했다가 못하게 되면 공격받게 되거나, 예상치 못한 일이 터질 수도 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되면 결국 모든 책임은 그 말을 한 사람에게 돌아오기에,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확답을 하지 않는 게 좋다는 의미로 저는 해석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대화는 영어가 그 자체가 아니라, 의도와 맥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통한 전략적인 말하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 방식이 짧든 길든, 둘러대든, 엉터리 문법으로 말하든 말이죠.